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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금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찢겨나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희생. 그녀를 위해 나를 바친다. 희생.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최선의 방법. ------------------------------------------------------ 내가 참 심심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물건. 쨌건 근 반년만에 올라온 4화 (...) --------------------------------------------------------------------------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학교에서 듣기로 하고, 뒤숭숭한 기분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앞에 떡하니 앉아서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으면 절대 나가지 않겠다! 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누구 때문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뭐야, 아까부터 한숨만 쉬고. 설명을 해줘, 설명을.』 안 그래도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버려서 똑바로 대하기가 힘이 드는데, 바뀌어 버린 련이의 모습은 날 더 부담스럽게 했다. 뭐, 고작 해봐야 머리 조금 길어지고─바닥에 닿을 정도지만─ 눈동자가 루비 빛으로 물들었을 뿐인데, 철판 깔기 기술이 발동하질 않는다. 『하아아───』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자 련이가 잔뜩 삐진 목소리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우!! 내일은 깨워주지도 않을 거야! 밥도 안 해주고 빨래도 안 해주고 청소도 안 해주고……』 『아아──, 그럼 굶어죽을지도..』 『그럼 어떡해! 이대로 학교 갈 수도 없고... 히잉..』 대책이 안 선다. 대책이. 사람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어서야 학교에서 애들이 놀라서 넘어지겠어, 진짜. 머리카락이야 자르면 된다지만, 저 눈동자는 진짜.. 도저히 방안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한 번 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랑 련이 빼고는... 『인아~ 나 왔... 응? 누구야 그 애는? 인이 여자 친구?』 어떻게 이 시간에, 그것도 련이도 있는 집에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이걸로 이모조차도 련이를 한 번에 못 알아본다는 불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멋쩍게 웃으며 이모에게서 시선을 피하자 련이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머나~ 귀엽다, 이 머리 좀 봐. 우후후후, 정인이 아직 어린앤줄 알았는데 능력 있네.』 『하아아─, 이모. 딸도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이모. 『응? 그러고 보니 련이는 어디 갔어?』 『..우우... 다 미워!!!!』 아─. 이련 선수. 자기 방으로 퇴장. 이제 이모를 상대할 사람은 나뿐이네. 『..성깔 있는 애랑 사귀는구나, 정인이 피곤하겠다.』 한숨. 『그러니까 쟤가 련이라니까요... 뭐, 그렇게 련이를 제게 주고 싶으시다면 사양하진 않겠지만..』 내 말을 들은 이모가 그제야 손을 휙휙 저으며 내 말을 단박에 거절했다. 『절대 안 되. 여하간, 련이는 어쩌다 저렇게 된 거야? 순식간에 머리가 자라나는 샴푸라도 썼니? 뭐, 귀여워 보이지 좋기는 하다만.』 언제나 느껴왔지만, 이모는 겉모습과 다르게 적응력이 너무 빠르다. 도대체 저걸 보고 어떻게 머리가 자라나는 샴푸라고 생각할 수 있지. 더 이상 변명할 기운도 없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확실히 말해주지 않을래? 내가 없을 땐 인이가 우리 련이 보호자잖니?』 이모가 방긋 웃으면서, 「대답 여하에 따라선」이란 말을 남기며 핸드백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도대체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어서 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냈다. 가벼운 신음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만들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역시 무리. 『어쩌다보니..』 주위의 온도가 3도는 더 내려간 느낌에 몸을 살짝 떨며 이모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모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 심정이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너, 그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거기에 대답했다. 『통할 줄 알았죠.』 순식간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변하는 이모님. 『..말이 돼? 하아-, 저래서 학교는 어떻게 다녔어?』 조금 전에 바뀌었으니까 지금까지 잘 다녔죠. 『잘 다녔죠.』 거짓말이라 생각은 안 했는지 이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신기하네. 그건 그렇다 치고 엄청 삐졌잖아? 설마 우리 련이에게 파렴치한 짓이라거나 한 건 아니겠지?』 『...설마요.』 ......이모 때문인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걸 꾹 참고 부정의 말을 꺼냈다. 『그럼 가서 빨리 달래줘야지, 오빠가 돼서 뭐하고 있어?』 이모가 계속 잡고 있었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왠지 귀찮아하는 것 같다? 이번 달 생활비는 없음이라고 하면 좀 나아질까?』 이모 딸 굶겨죽일 작정이십니까. 『그렇게 보여도 꽤나 성실했어요.』 그래도 신경 거스르지 않도록 대충 변명하고 날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문을 몇 대 쥐어박았다. 『자니까 들어오지 마.』 나는 지금 삐졌으니 들어오지 마! 로 들리는 건 내 귀의 착각일까. 『그럼 지금 들리는 건 잠꼬대인가.』 『맞아, 잠꼬대야.』 네, 네. 좋은 꿈 꾸고 계세요. 『그럼 자고 있으니까 나 들어가는 것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열려진 틈 사이로 보이는 련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우... 오빠.....』 주위에 널브러진 머리카락. 자르고 잘라서 한참을 짧게 만들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인데. 어째서 저것은 하나도 줄어들질 않는 건가. 이모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짙은 흑색의 그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자식이 떠올라버렸다. 『...역시 난 그 녀석이 싫어.』 조용히 혼자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지나치기엔 련이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누구?』 『잠시만 기다려봐.. 역시 당사자가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잘려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련이는 궁금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나서, 련이의 앞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몰랐으면 했는데. 『거짓말은 안 하니까, 련이 네가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야. 솔직히 그걸 겪은 나조차도 현실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드니까.』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자 련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애써 무시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꿈속에서 용과 소녀를 만나 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일. 일어나자마자 네 손목에 차여있는 손목시계를 보고 미친 듯이 아카식 드라이브를 찾아서 간 일. 택시 기사가 괴물로 변한 일. 네 안에 용이 깨어나서 괴물을 없애버린 일. 그 용을 갑자기 나타난 학교 선배가 잠재우고 쓰러진 일. 그렇게 하나하나 차분하게 말하자 련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골똘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자기 가방에서 샤프와 연습장을 꺼내었다. 뭘 하는 건가 잠시 바라보고 있으니, 련이는 놀랄만한 속도로 손을 움직여 순식간에 스크래치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생긴 거?』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섬뜩한 두 눈과 육중한 몸체는 그것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이걸 어떻게...』 『모르겠어, 오빠한테 이야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나던걸.』 젠장, 그 속에서 네 존재감을 알리지 말란 말이다! 『...우..우. 왜, 왜 그래.』 ..나도 모르게 표정이 험악해졌는지 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냐, 맘에 안 드는 자식이라서.』 『우.. 지, 지울게.』 련이는 지우개로 그림을 지워나가기 시작했지만, 별로 맘에 드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아, 그거 그냥 나를 줘.』 『으응? 응..』 별 다른 말도 없이 그냥 그 페이지를 쭉 찢어 주는 련이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게 묘하게 순종적이었다. 이것도 그 자식 때문일까. 페이지를 받아서 대충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련이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거야.』 『...결국 오빠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네? 그럼 그냥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한숨만 쉬고..』 이런 이상한 세계에 넌 들어오지 않길 원했으니까. 『솔직히 이런 얘기 나라도 안 믿겠다.』 하지만, 련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빠가 얘기한 거라서 그런지, 진짜란 생각밖에 안 들어.』 ...그런 말 하지마, 련아. 그렇게 사람을 감동 줘 버리면, 널 좋아하는 누군가가 뭘 할지 모르잖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긴 한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뭐야, 한숨 쉴 건 오빠가 아니라 나라고.』 그런 말 하면 나도 해줄 말이 있지. 『너 살린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닌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내 말에 련이가 할 말이 없어졌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오빠니까..』 설마 변명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련 양. 뭔가 한마디 쏘아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얘기가 끝나질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련이 머리만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건 늦었으니까 이제 자야지.』 련이를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몸을 돌려서 나가려고 하자 내 옷깃을 살짝 잡아 당겼다. 『저기 있잖아, 오빠. 고, 고마워. 잘 자!』 아무래도 하기 부끄러운 말이었는지 련이는 그 말만 하고 후다닥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뭘, 네 말대로 오빠니까 당연하거지.』 한마디 툭 던져놓고 밖으로 나오자 이모가 붉은 빛이 감도는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모 역시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는 련이의 상태를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잘 됐어요.』 이모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면서 빈 잔을 반대쪽으로 밀었다. 『한 잔 마실래? 인이도 벌써 고등학생이잖아.』 아무래도 술인가 본데, 저런 식으로 권하시는 거 보면.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모의 반대편에 앉았다. 『흐응. 꽤 좋은 매실주인데 말이지. 뭐 어쨌건 이제 한 3달 정도 됐는데 여기는 어때? 련이가 이상한데서 떼쓰거나 하진 않고?』 『좋아요, 불편한 점도 하나 없고요. 조금 떼쓰긴 하지만 어린애 투정부리는 것처럼 귀여우니까 별 문제 없어요.』 불편한 점은커녕 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하다. 이리저리 다 챙겨주고 나이대도 비슷하니까 놀기도 좋고, 잔소리가 조금 많긴 하지만 그것도 귀여운 점이고. 『그야 당연하지, 내 딸인데.』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는데 이모마저 그러실 줄이야... 『흠흠.. 이게 아니지, 인이 너 말이야 우리 딸애를 어떻게 생각해?』 ...련이를 어떻게 생각하냐니?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갑작스런 질문에 내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가슴이 철렁 거렸기에 내 마음을 구석으로 처박아버리고 아무 문제없는 무난한 대답을 했다. 『뭐.. 좋은 애지요. 잘 챙겨주기도 하고.. 매사에 꼼꼼하기도 하고..』 『그것뿐?』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설마.. 이모가 알 리가 없는데.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데요?』 『솔직한 대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솔직한 대답이었는데 말이죠.』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솔직한 대답이지. 『흐응... 그래, 뭐. 가슴은 좀 어때? 아직 많이 아프니?』 『아아, 뭐 요새는 괜찮아요.』 예전에 련이가 차에 치일 뻔 했던걸 구하고 대신 다쳤던 적이 있다. 뭐, 갈비뼈라도 몇 개 부러져서 폐를 찔렀는지 폐도 안 좋아지고 심심하면 현기증도 일어났었지만 요새는 별로 그런 증상을 못 느꼈다. 아마 련이랑 같이 살게 되고나서부터 인 것 같은데. 이모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는 잔에 담긴 술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끝인가. 『이모, 라이터 없을까요?』 멈칫하는 손. 『흡연하니?』 ...한다고 해도 이모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하겠습니까. 『설마요, 태울게 있어서 그래요.』 이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핸드백에서 지포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핸드백 속에 라이터가 그것도 지포 라이터가 들어가 있다니. 『흡연하세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지포 라이터를 받았다. 『아니, 련이가 구해달라 그래서.』 『예? 련이가 왜요?』 『글세, 남자친구한테 선물이라도 하려나보지, 뭐.』 ...남자친구라니. 그런 게 있었으면 련이가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지. 련이는 이걸 어디다 쓰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련이가 쓸 만한 쓰임새는 안 보이는 물건인데. 뭐,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어쨌건 그럼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는 내 등 뒤로 ‘불장난 많이 하면 밤에 오줌 싼다. 적당히 해.’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나이는 지나갔습니다, 이모. 밖으로 나와서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 앞에 걸터앉은 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종이를 꺼냈다. 불길한 용. 그림 속에 깃들어서도 그 불길함을 지우지 않는 그 용을 태워버렸다. 아니, 태우려고 했다. 분명히 라이터로 불을 붙였는데, 불은 붙었는데 불이 번져나가질 않았다. 『젠장.. 그냥 얌전히 사라져.』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라이터로 종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은 절대로 번져나가지 않았다. 『젠장..』 계단에 종이를 대고 짓밟아서 불을 끈 후 종이를 다시 들었다. 그 정도로 바닥에 문질렀는데도 그 그림은 없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너무나도 기분이 더러워서, 종이를 양손으로 잡고 반으로 찢었다. 찌익- 하고 반으로 잘려나가는 그림. 다시 잡고 반으로 찢었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한참을 잘게 찢어버리고 나서 거기에다가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타들어가는 종이들. 아까와는 다르게 종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불에 타서 없어졌다.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마, 이 자식.』 바람에 흩날리는 재를 보며 거칠게 한마디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끼이이익-!!!!!! 쾅-!!!!!! 빙판에 미끄러진 건지 기이한 회전과 함께 날아가는 자동차. 그 자동차에 치이려고 하는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감싸고 날아가는 소년의 모습. 아아. 이모, 틀렸어요. 난 차에 치인 게 아니라, 차에 치이는 모습을 봤을 뿐인걸요. ***** 달콤한 잠 속에서 전혀 예고도 없이 현실 속으로 끌어내려졌다. ...련이가 깨워주기도 전에 일어나다니, 3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인가.. 세상이 멸망할 징조인가 본데.. 는 둘째 치고. 지금 날 끌어안고 있는데다가, 내 눈앞에 있는 이 아가씨는 도대체. 『...련..아?』 반응 없음. 남의 방에 들어와서 남 끌어안고 뭐하는 거야 이 아가씨. 아무리 오빠로 생각한다고 해도 너무 경계심 없는 거 아닐까. 어쨌건 일단 좀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천천히 몸을 움직여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련이가 더 깊게 파고 들어온지라 몸을 빼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내가 죽부인도 아니고 왜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는 거냐, 련아아. 『하아, 하아』 5분이라는 사투 끝에 겨우 몸을 빼내는데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침대에서 나가려는 순간 련이가 내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으응.. 안 돼, 오빠...』 ...이미 깨어나 계신 거 아닌가요? 련 양. 『하아─, 안 깨우고 일어나기는 글렀나.』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름끼치도록 좋은 기분 좋은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지만, 내 기분은 좋아지기는커녕 최악으로 나빠졌다. 그 자식이 생각나는 머리잖아 이건. 젠장... 후우, 오늘 만나기로 한 그 선배는 이걸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으면 좋겠는데. 조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6시였다. 련이도 머리 때문에 씻는데 오래 걸릴 테니 지금쯤 깨우면 되겠지. 『련아, 아침이야 아침. 나 밥 해줘야지.』 『으응.. 오빠.. 좋은 아침..』 흔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눈을 뜨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련이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응, 좋은 아침.』 련이도 날 따라 배시시 웃다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그런데 오빠가 왜 내 방에 있어?』 잠이 덜 깼구나, 이 아가씨. 거기다 그 질문은 내가 너한테 던지려고 했던 건데. 『여기 내 방 아니던가.』 내 말에 련이가 그제야 가벼운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긴 왜 데려온 거야?』 ...결론이 그렇게 되는 겁니까. 내가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은 이상 왜 널 데리고 오겠습니까아. 거기다 아직도 내 허리를 잡고 있는 건 도대체 어디의 누구 손일까요. 『내가 그렇게 힘 쓸 곳이 없는 줄 알아, 그 무거운 몸을 끌고 여기까지 오게. 네가 온 거 아냐?』 『우우!! 안 무겁다 뭐! 오빠는 변태, 치한, 말미잘!』 ..아무래도 무겁다고 한 것 때문에 뒷얘기는 듣지도 않았나본데.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자는데 오빠가 자기 방으로 납치해왔다고!』 이 아가씨가 정말. 『네가 온 거잖아!』 언성을 약간 높이자 련이가 혀를 살짝 내밀며 볼을 긁적거렸다. 『에헤헤, 화났어?』 에휴, 저런 귀여운 아이를 내가 뭐 어쩌겠어.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련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좀 씻고 학교 갈 준비 해야지. 『그럼 먼저 씻을게.』 『응? 아, 잠깐만.』 련이는 방을 나가려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몸을 살짝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건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인데. 『있잖아.. 앞으로는 같이 자면 안 돼?』 ...놀랐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날 정도로 충격 넘치는 대사. 정말 날 어디까지 시험에 들게 할 작정인거니, 련아. 『어제 오빠한테 그 이야기 들은 다음부터 무서워서인지 잠이 안 온단 말야..』 련이의 그 말에 원래는 딱 잘라 거절할 일을 한참을 고민했다. 계속 해서 한 침대에서 같이 자서야 내 마음이 먼저 무너질 것 같지만.. 『그래. 뭐, 괜찮겠지』 련이 몸에 이상이 있을 때 먼저 알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승낙해버렸다. 무기력한 나라도 그 정도는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 『응응, 그럼 난 아침 준비 할 테니까, 먼저 씻어.』 련이는 그렇게 말하곤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서 부엌으로 갔다. 그럼 나도 준비해볼까. 그렇게 샤워실로 들어가서 샤워하고 나온 후에, 련이의 포니테일을 보고 잠시 멍하니 굳었던 일은 혼자만의 비밀이다.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점심시간. 시끄러운 교실을 뒤로하고 아연 선배와의 약속 때문에 옥상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명진이 녀석이 나를 불렀다. 『여~ 기생오라비!』 네 놈의 인생 목표는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더냐. 『여~ 근육덩어리!』 똑같이 응수해줬지만, 명진이는 내가 원하는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어제는 잘 쉬셨수?』 『뭐, 련이랑 즐겁게 보냈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나 스스로도 참을 수 없어 쿡쿡대며 웃자, 명진이 녀석은 그걸 어떻게 받아 들인건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를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신부감에게 이상한 짓을 했다간 그대로 초크슬렘을 넣어주겠어.』 그 내용이 진지한 표정과는 정 반대라 오히려 나에게 웃음만 자아냈지만 말이다. 뭐, 여기서 이렇게 이 녀석과 노닥거리고 있는 것도 재밌겠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는데. 『그럼 난 아연 선배랑 만날 약속 때문에 먼저 실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로 후다닥 물러나는 이명진군. 『뭐!!! 그 집행부 No.2 말이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유명하긴 유명한 선배인가 본데. 근데 왜 난 모르고 있었지. 『뭐, 남자의 비밀이라는 거지.』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답해주고 난 후, 계단으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등 뒤로 「그래도 메피스토한테 안 걸린 게 다행이지..」 라고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녀석은 무시하고 말이다. 잠시 후, 약간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으로 나가자 한 가운데 돗자리를 펴놓고 대자로 누워있는 아연 선배가 보였다. 아무리 집행부라지만 저건 뭔가 좀 아니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선배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왔네?』 선배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선배는 고개를 까닥 들어서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예의상 가볍게 인사하자 선배는 몸을 일으켜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에이, 선배가 뭐냐. 편하게 형이라 그래, 형.』 초반부터 이렇게 친근하게 나오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련이를 구해준 선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침에 도시락을 까먹어서 그러는데 좀 얻어먹을 수 없을까.』 .....10초 동안 고민. 『예..』 『에이, 싫으면 싫다 그래,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사실 련이가 날 위해 해준 음식을 남 주는 건 진짜 싫은 일이지만.. 그래도. 『아아,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 보답은 해야죠.』 그렇게 말하며 도시락을 개봉했다. 오늘의 주 메뉴는 계란말이인가. 『훗, 그 동생양 소개 시켜 주기로 했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뭐.』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당시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랬을지도.... 라곤 해도 진짜 정신이 없긴 없었군. 하아, 그래도 생명의 은인한테 「안 됩니다!!」 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 뭐야! 약속했으면서!』 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은 모양이다. 선배는 그게 거부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저야 주선은 하겠지만.. 련이가 거부하면 저도 어쩔 수 없지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련이는 남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으니 내가 살짝 주저하면서 말하면 충분히 거절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엔 웃음을 참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있었다. 『풋! 농담이야 농담. 둘이 사이 좋아 보이던데, 그냥 오빠 동생?』 아니였으면 좋겠지만. 『뭐, 그렇죠.』 『그래그래. 그럼 먹으면서 얘기 하자. 일단 궁금한 게 있겠지? 그것부터 물어봐.』 고개를 끄덕이고 제일 중요한 용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나온 답변은 도대체 일반 상식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영혼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세상을 유지하려는 부류, 다른 하나는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부류. 선배가 거기에 대해 예시로 든 것이 공룡의 멸종이었다. 공룡이 멸망한 이유는 후자가 전자에게 승리해서 세상이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자 부류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한명 죽었다고 한다. Black Light. 세상을 지탱하는 9가지 요소를 몸에 담고 있던 존재. 하지만, 그의 소멸로 인해 그 요소가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고 그 요소 중 하나가 련이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내가 보았던 용이었다. 대충 용에 대한 의문점은 풀렸다. 두 번째 질문은 해결 방안이었다. 선배가 얘기 해주고, 모자란 정보는 내가 보충을 해주며 나온 결론은.. 없었다. 지금 련이는 분명히 이전보다 색기가 넘치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변해버리면 용의 회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B.L(Black Light)가 살아있었다면 간단하게 회수해 갔을지도 모른다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찾을 수는 없으니.. 게다가 눈 색─눈은 혼과 마음을 대변하는 창이라고 한다─ 마저 변했을 정도라면 용이 련이의 몸속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분명히 어떤 방면으로든 용의 영향이 련이에게 미쳤을 거라고 하는데.. 『머리카락을 잘라도 잘라도 다시 길어지는 것도.. 그런 영향.. 인가요..』 『머리카락이 길어져?!! .....그건 심각한 건데...』 젠장... 명색이 련이의 오빠라는 사람이. 련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람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니!!!! 선배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두 부류의 영혼들에 대해 이야기 했지? 후자의 부류는 힘을 절실히 필요로 해. 제어가 되던 제어가 되지 않던 강력한 힘을. 아마 네 동생은 그 타켓이 될 가능성이 커. 지금이야... 아직 그렇게까지 티가 나진 않지만, 네가 동생에게 색기가 생겼다고 느끼는 걸 봐선 그 아이의 영혼은 강해지고 있어.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되겠지. 그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아마도 납치 하던가 할 걸.』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로 막았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련이가 뭘 했다고! 『대처 방안이 없지는 않아. 그놈들이 힘을 바라는 건 쓰기 위해서지. 그만큼 강한 힘이니까 자기가 개발해서 제어할 만큼 써서 자기 자신을 지키면 돼. 그렇지만.. 아마, 너나 네 동생은 이제 평범한 생활로는 돌아가기 힘들거야. 원하지 않아도 후자의 부류들이 가만두지 않겠지.』 아아아아...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우린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일에 휘말리게 된 거지. 말도 안 돼. 이딴 일은 있을 수 없어. 왜...! 왜..!!! 련이마저 이런 상황에 빠져야 하는거야!!! 지키고 싶은데.. 『지키고 싶은데..』 『무엇을?』 『이 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하, 뭐야. 너 괜찮은 녀석이군. 좋아, 사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특별 서비스로 말해주지. 어쩌면 용을 가진 네 동생보다 네가 가진 힘이 더 강할지도 몰라.』 ...그 말은 설마...? 『네 각오만 있다면, 동생은 놔두더라도 네가 피 흘리고 땀 흘리고 해서 네 동생의 일상을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지.』 아아, 남아있다. 남아있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바보 같은 자식이. 련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어. 아무것도 아냐. 몸이 찢어져 다시는 걸을 수 없더라도 련이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좋네요 그거──』 『말해두지만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냐. 보상도 없고 대가도 없어. 그냥 너만 죽어라 희생되는..』 그렇지 않아요 선배. 살짝 웃어보였다. 『련이의 일상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 있어요.』 『...보통 동생을 위해서 그렇게 까지 하나? 아니.. 뭐, 여기까진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겠다만.』 글쎄요? 이런 오빠도 있으니 그런 오빠도 있을지 모르죠. 『귀여운 동생이니까요.』 선배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넌 몰라도.. 그 아이는 널 그냥 오빠로만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듣고 싶지 않다. 이 이상 들어선 안 된다. 이 이상 들었다간. 내 마음이 부서진다. 『아아,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죠.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하면 될 까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결정하는 거냐? 후회하지 않겠어?』 당연한 말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파직!!! 새까만 스파크가 선배의 손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선배의 손에는 검은색 단도가 나타났다. 『조금 길을 건너 뛰는 것 같다만, 최대한 빨리 전력이 되려면 이것부터 시작해야 돼. 이건 내 혼의 분신이며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지. 너도 영혼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촉매로 이런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걸 소울 리얼리즘. 줄여서 S.R 이라고 하지.』 그렇게 선배의 설명이 조금 더 길어지려는 순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다. 『이런.. 뭐 좋아. 오늘은 좀 그렇고 토요일 날 시간 있어?』 ..명진이 녀석과 약속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연락해. 내 번호는 XXX-XXX-XXXX 이다.』 『X..XX XXX XXXX. 예, 기억했어요.』 『좋아, 기억력 괜찮은데? 이런 늦었군. 그럼 나중에!』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옥상을 내려갔다. 아래를 내려 보자 언제 비워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도시락이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응, 이걸로 좋겠지. 널 이런 세상에 끼어들게 하지 않을게. 련아. 그녀를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날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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